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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 가을의 시 모음 (30편)
1) 가을 편지 1 / 이해인 詩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2) 가을 / 정호승 詩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3) 가을에 / 오세영 詩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4) 가을 산길 / 나태주 詩
맑은 바람 속을 맑은 하늘을 이고
가을 산길을 가노라면
가을 하느님,
당신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언제나 겸허하신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알의 익은 도토리알 속에도 계셨고
한 알의 상수리 열매 속에도 계셨습니다.
한 알의 개암 열매 속에도 숨어 계셨구요.
언제나 무소유일 뿐인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세 살배기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
수풀 사이로 포르릉 포르릉
날으는 멧새를 따라가며
걸음마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5)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詩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리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6) 가을의 기도(祈禱) / 김현승 詩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7) 가을 / 강은교 詩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8) 가을 / 남호섭 詩
시골 갔다 오던
버스가 갑자기 끼이익!
섰습니다.
할머니 자루에
담겨 있던
단감 세 알이
통, 통, 통
튀어 나갔습니다.
9) 가을엔 / 조태일 詩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돌아가게 하라.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가을바람 물들며 지나가듯
지상의 모든 것들 돌아가게 하라.
지난 여름엔 유난히도 슬펐어라
폭우와 태풍이 우리들에게 시련을 안겼어도
저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라.
누가 저처럼 영롱한 구슬을 뿌렸는가.
누가 마음들을 모조리 쏟아 펼쳤는가.
가을엔 헤어지지 말고 포옹하라.
열매들이 낙엽들이 나뭇가지를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대지와의 만남이어라.
겨울과의 만남이어라.
봄을 잉태하기 위한 만남이어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떠나게 하라.
단풍물 온몸에 들이며
목소리까지도 마음까지도 물들이며
떠나게 하라.
다시 돌아오게, 돌아와 만나는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돌아가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만나는 날까지
책장을 넘기거나,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아예 눈을 감고 침묵을 하라.
자연이여, 인간이여, 우리 모두여.
10) 가을 / 정연복 詩
하늘 저리도 높은데
가을은 벌써 깊다
말없이
자랑도 없이
나뭇잎마다 단풍이나
곱게 물들이면서
하루하루 가만가만
깊어 가는 가을.
아!
나는 얼마나 깊은가
나의 생도 고운
단풍으로 물들고 있는가.
11) 가을 편지 2 / 이해인 詩
도토리만 한 꿈 한 알
밤 한 톨만 한 기도 한 알
가슴에 품고
길을 가면
황금빛 벼이삭은
바다로 출렁이고
단풍숲은 불타며
온 천지에 일어서고
하늘에선 흰 구름이
큰 잔치를 준비하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살아 있음의 축복
가을이여, 사랑이여
12) 가을의 소원 / 안도현 詩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13) 가을 / 나호열 詩
툭……
여기
저기
목숨 내놓는 소리
가득한데
나는 배가 부르다
14) 가을 / 김용택 詩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 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15) 가을에는 / 강인호 詩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16) 가을에는 / 박제영 詩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 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볼 일이다
17) 씨앗 / 허영자 詩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18) 가을 편지 / 유안진 詩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19) 가을 연못 / 정호승 詩
경회루 연못에 바람이 분다
우수수 단풍잎이 떨어진다
잉어들이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가까이 올라와 단풍잎을 먹는다
잉어가 단풍이 되고
단풍이 잉어가 되는
가을 연못
20) 가을의 시 / 홍수희 詩
가을은 어느 날
서가書架를 정리하다 툭, 떨어진
낡은 수첩이다
눈물이 핑그르르 맺혀져 오는
먼지가 뽀얀 주소록이다
21) 가을 / 조병화 詩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22) 씨앗 / 허영자 詩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23) 울어도 어울리는 계절 / 방우달 詩
술을 많이 마시면
사철 어느 때든지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울 수 있습니다
가을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가을은 나를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울면서 돌아갈 운명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가을은 인간을 울게 하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울어도
수치스럽지 않은 계절입니다
겨울에 울면 가련해 보입니다
여름에 울면 어색해 보입니다
가을은 울기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뺨을 맞아도 괜찮은 계절입니다
24) 가을 고백 / 나태주 詩
가을입니다
버리지 못할 것을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가을입니다
잊지 못할 일을
잊게 하여 주옵시고
용서하지 못할 것들을
용서하게 하여 주시고
끝내 울게 하여 주소서
가을입니다
다시 잠들게 하시고
새롭게 꿈꾸게 하소서
25) 가을 편지 1 / 나호열 詩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26) 들국화 / 정연복 詩
삼월 목련처럼
눈부시지 않네
오뉴월 장미같이
화려하지 않네
가슴 설레는 봄과
가슴 불타는 여름 지나
가슴 여미는
서늘한 바람결 속
세상의 어느 길모퉁이
가만가만 피어
말없이 말하고
없는 듯 그 자리에 있는 꽃
찬 서리와 이슬 머금고
더욱 자기다운 꽃
한철 다소곳이 살다 지고서도
그리운 여운은 남는
인생의 누님 같고
어머님 같은 꽃
27) 가을날 / 손동연 詩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 주고 있었다
28)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 이해인 詩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무잎이 물들어
덜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29) 가을 하늘 / 윤이현 詩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30)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詩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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