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30만 원만 주구려 >
.
나 늙으면 정말 편하게 살고 싶으니
여보!
한달에 내게 연금이나 잡다한 게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으나
집안경제 신경 안 쓰고 살아왔듯 당신 알아서 하고
한 달에 용돈 30만 원만 주구려.
이삼일에 한번 동네 구판장 툇마루에 앉아
벗들과 소주 몇 병에 두부김치 안주 삼아
나이 들어 더 챙겨 먹어야 된다는 끼니도 어떤 때는 걸러 가며
이런저런 담소도 나누고 웃음도 웃고
늦밤에 산울림 노래나 흥얼거리며 들어오고 싶으니.
또한 이틀에 한 갑씩 피우는 담배. 끊고 싶은 마음 눈곱
만큼도 없으니 내 담배 태우는 것 이리 살면서 끊으란
소리 없이 이해 해 주었으니 담배 값도 있어야 하잖소.
늘 하던 대로 주말에는 내가 끼닛거리니 반찬거리
만들어 일주일에 이틀은 실험정신 강한 요리에
도전도 하고, 당신과 애들 마루타 삼아 맛있는지
테스트하며 생체실험 하던 것, 애들 따로 나가 사니
당신이나 남아 계속 실험도구가 되어 주구려.
그러니 간혹 내 먹고싶은 군음식거리도 사야 되니
한 달에 꼭 30만 원만 챙겨주구려.
말 안 해서 그렇지 옆집 김 씨는 40만 원 받을 거랍디다.
그리고 나이 들었다고 안 해본 빨래시키지 말구려.
설거지는 도와줄 수 있으나 이상하게 빨래는 체질에
맞지 않으니 무거운 것 널 때만 불러주구려.
당신 알다시피 우리 집 세탁기가 뭔 색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잖소.
내가 당신에게 막말 없이 존대하며 살아왔고 내 당신에게
잔소리 한 적 없으니 당신도 나에게 잔소리 좀 줄여 주구려.
귀에 못이 박혔어도 이상하게 잔소리는 아직 익숙지 않으니.
그리고 한가한 시간이라 따로 시간 낼 필요도 없지만
두어 달에 한 번씩 차 가지고 애들 사는 것 구경하러 갑시다.
애들 바쁘니 오라 가라 하지 말고 한가한 우리가 움직입시다.
그리고 애들에게 폐 되니 저녁 되면 일찍 돌아옵시다.
그리고 혹 며느리가 당신 몰래 내게 쥐어준 용돈 있으면 빼앗지 말구려.
살다 보면 비상금이라는 것도 있어야 된다오.
나도 명색이 변두리 시인일지라도 시인인데 품위유지는 하며 살아야잖소.
그리고 살고 있는 아파트 팔고 마당 있는 집으로 가서
개라도 한 마리 키웁시다.
물론 뒤치다꺼리 당신이 해야 한다고 투덜대겠지만
나도 간간히 도울 터이니 그리하면 어떻소.
이왕 기르는 김에 염치없지만 병아리도 몇 마리 산다 하면
혹 뒤로 넘어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소.
사람 정가는 것은 살아있는 동물이 가장 좋잖소.
아침이면 마당 딸린 텃밭에 먹을 만큼 채소 돌보다가
늦은 아침 먹고 창문 열고 바람맞으며 적고 싶은 글
실컷 적어보고 쌓인 책들 돋보기 끼고 다시 읽기도 하고
그것도 싫으면 뒹굴뒹굴 방바닥 굴러 보고도 싶구려.
나중에 글깨나 모이고 당신 나보다 오래 살거든 책으로 엮어주오.
몇 번 엮어 세상에 내어 봤으니 이제 더 이상 따로
세상에 내어 놓지 않아도 되니
집안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 주구려.
그리고 잔재주나마 나름의 손재주로
햇살 좋은 날 대비하여 흔들의자 하나 만들어 볼까 하오.
따스한 볕 받고 시간 보내는 데는 정말 좋을 것 같소.
어떤 때는 기대 잘 수도 있게 얇은 이불 하나 곁에 두면
더 좋을 것 같구려.
남들은 실버타운에 들어가 편히 산다며 내게 투덜거릴 거지만
내 벌은 돈 애들 뒷바라지한다고 당신이 다 사용했지 않소.
그래도 이게 어디요, 이리 오막살이라도 집 한 칸 있고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자식들 있고, 늙어 별 아픈데 없으니
이게 복이잖소.
그러니 사는 날까지 즐겁게 삽시다.
그리고 욕심이지만 나 늙거든 한 달에 30만 원만 주구려.
세상이 나를 술 마시라 하고 즐기며 살아라 하는데
그리 살아야잖소.
여보!
부탁이오.
옮긴 글
'세상의 따뜻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 (0) | 2023.01.03 |
---|---|
삶이 힘겨울 때 (0) | 2023.01.03 |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 (0) | 2023.01.02 |
어머니 환갑잔치 막내의 선물 ** (0) | 2023.01.01 |
변장한 소년 천사 ** (0) | 2023.01.01 |
크리스마스의 기적 (0) | 2023.01.01 |